정보화마을 제주 추자 참굴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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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약사 | 주요지명


    대서리(大西里)(대작지(大作之), 큰짝지, 면청소재지)

    『남사록(南 錄)』에 김상헌이 <신도(身島) >라고 기록한 상추자에 동남향으로 앉아 있는 포구마을이다. 지금도 뒷산에 최영장군의 사당이 자리잡고 있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에 이미 여기에 토당(土堂)이 있어 후풍하던 뱃사람들이 바람 자기를 이 당에 빌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애월읍 고성리의 항파두리에 웅거하고 있을 때(1273년) 이를 섬멸하러 오던 김방경과 몽고의 흔도가 여기서 후풍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김상헌도 그의 기행문 『남사록(南 錄)』을 통해서 여기서 3일간 후풍했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별초 토멸 후 1세기 원(元)의 제주 통치가 있고 나서 고려 장수 최영이 목호(牧胡)를 치러 올 때 여기서 후풍하며 이 섬 사람들에게 그물 깁는 법을 가르쳐 줬다는 전설로 미뤄 이미 이 시대에 여기 어촌이 형성돼 있었을 수도 있다.
    과거 서쪽을 <큰작지 >, 동쪽을 <작은작지 >라고 했으며, <당그미 >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한때 1•2구로 나뉜 적도 있는데, 1구는 <당끝 >에서 <옛지서도랑 >가지로 하고 2구는 <옛지서도랑 >에서부터 효자문이 있는 데까지로 경계지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한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의 성씨를 입향 대수 차례로 정리하면 밀양박씨(密陽朴氏) 청제공파(淸齊公派) 인택(仁宅)이 1659년 추자 영흥리에 들어온 후 손자(여지)가 이곳 대서리에 와서 14세까지 살고 있으며, 같은 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 재춘(載春)이 추자에 온 후 9대, 같은 박씨 다른 규정공파 역시 만철(萬哲) 이후 12대를 살고 있다. 박씨 3파는 이 마을의 대성(大姓)을 이루고 있다.
    다음으로 충주지씨(忠州池氏) 석회(石會)가 입향 후 11대, 전주이씨(全州李氏) 효녕군파(孝寧君派) 효윤(孝潤)이 1719년 입도 후 10세로 이들이 10세 전후를 이 마을에서 사는 경우이다. 진주강씨(晋州姜氏)는 통정공파(通亭公派) 주문(柱文)이 1759년 이 마을로 와서 9대, 전주추씨(全州秋氏) 역시 원일(元日)이 여기 와서 9대를 산다. 추씨 입도조의 묘는 이 마을 <통쇠골 >에 있다.
    원주원씨(原州元氏)는 대철(大喆)이 여기와서 8대, 남양홍씨(南陽洪氏)는 문정공파(文正公派)가 1787년에 들어와 5세, 김해김씨(金海金氏)는 김녕군파(金寧君派) 중연(仲淵)이 들어온 후 5세, 평산신씨(平山申氏)는 문희공파(文僖公派) 모(模)가 들어온 후 3세, 진주김씨(晋州金氏)는 갑산(甲山)종친파 석낙(錫洛)이 온 후 2세, 제주고씨(濟州高氏)는 두찬(斗燦)이 추자로 온 후 2대를 살고 있다.

    • 제주고씨(濟州高氏) ∼ 공언(1681∼ )이 들어왔다.
    • 전주이씨(全州李氏) ∼ 완도 소안도에 살던 효휴(孝休. 1659∼ )와 두 아들 동흥(東興. 1680∼ ) 동황(東黃)형제가 들어왔다
    • 밀양박씨(密陽朴氏) ∼ 효원(孝元. 1511∼ )의 6대손 만철(萬哲. 1730∼ )이 들어왔다. 서촌(西村)에 살아 서촌파(西村派)또는 경력공파라 한다. 그의 6대손 명래(明來)가 구한말 효도해 관찰사로부터 표창을 받고 후손과 주민들이 1931년 9월 28일 효자정각을 세웠다.
    • 원주원씨(原州元氏) ∼ 거문도에 살던 원명강(明剛. 1648∼1741)의 아들 대철(大哲. ∼1827)이 들어왔다. 부인이 해남 화산 출신 전주 이씨이다.
    • 추계추씨(추계秋氏) ∼ 완도 모도에서 살던 국린(國麟. 1705∼ )의 증손자 영수(英秀. 1856∼?)가 들어왔다.
    • 김해김씨(金海金氏) ∼ 소안도에 살던 이주(二住. 1814∼ )의 동생 영수(英洙), 춘수(春洙) 형제가 들어왔다.
    • 남양홍씨(南陽洪氏) ∼ 성만(洪成萬. ~1886)이 우수영에 들어왔다.
    • 해주최씨(海州崔氏) ∼ 강진 군동면 내동에서 살던 길순(吉淳. 1891∼ )이 들어왔다

    횡간도(橫干島)

    횡간도(橫干島)는 행정구역상 지금은 대서리에 속해 있지만 구전에 따르면 300여년 전 강씨가 설촌한 것으로 전해 온다.
    그 후 1851년에 달성서씨(達城徐氏)가 들어가 제2개발을 착수하고, 이어 김해김씨(金海金氏)와 전주이씨(全州李氏)도 들어간다. 전주이씨의 선조는 앞서 들어간 다른 성씨들이 이미 좋은 땅을 다 차지해버린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개발을 하여 이봉춘(李鳳春)씨 시대에는 보리 갈고, 멸치를 잡아 추자도 안에서 호세 제1인자가 되었으며, 귀신도 멸치젓 선불을 주고 갔다고 할 정도로 명성을 남겼다. 풍채 좋고 돈 많이 번 그의 일화는 지금도 추자도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1951년 8월 28일, 여기에 추자초등학교 횡간분교장이 설립되었으나 여건의 변화에 따라 차츰 학생 수가 줄어 40여년 만인 1991년 3월 1일에는 폐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분교장 자리에 세워진 <배움의 옛터 - 1994년 11월 추자초등학교장이 세움 >비에 따르면 그 동안 이 분교장은 16회에 161명의 졸업생을 낸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 횡간도는 밭은 거의 휴경인 상태로, 앞의 성씨들 외에도 용씨, 유씨, 최씨, 윤씨, 오씨, 고씨, 박씨 등이 살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지나친 노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